배움에는 구별이 없다 – 공자와 그의 제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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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재생지원센터 한종수작가
기사입력 2016-04-18 [21:31]

 

▲     © 행복세종타임즈

 

공자의 천하주유와 귀국

    

치국평천하의 뜻과 최고의 학식을 갖추었지만 삼환씨를 비롯한 귀족 세력의 전횡과 외국의 간섭으로 조국 노나라에서 뜻을 펴지 못한 공자는 당시로는 인생을 정리해야 하는 나이인 55세 때 (기원전 497년), 과감하게 몸을 일으켜 자신의 정치이상을 구현할 군주를 찾아 국외로 나갔다. 그 뒤 노나라로 돌아온 68세 (기원전 481, 노애공 11년)까지 14년 동안 각지를 돌아다니며 여러 나라의 군주를 만나 도덕정치의 실현을 역설했으나 위나라 영공처럼 조 6만두의 녹봉을 지급하는 이는 있었지만 그의 이상을 받아들이는 이는 없었다. 공자의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은 결국 당대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래서 탄식하면서 귀국할 뜻을 비쳤고, 노나라의 실력자인 계강자의 초청을 계기로 노나라로 돌아왔다. 그의 노력은 좌절되었으나 천하를 두루 둘러본 공자는 더욱 폭넓은 식견을 지니게 되었고 ‘치국평천하’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더욱 굳혔다. 그가 훗날 50대를 지명 知命으로 회고했음은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만년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저작들을 남기고 이를 전달할 제자들을 교육하는 ‘만세사표’가 되었다.

    

공자가 후학을 양성한 이유

    

결과적으로 공자는 생전에 자신의 철학을 현실 정치에서 실현시키지 못하였으나, 후학을 양성하고 자신의 사상을 정리하면서 혈연에 기반한 봉건제도가 무너지고 인간의 학식과 실력을 근본으로 하는 세상이 언젠가 올 것이라고 믿었다. 사실 그가 제자들을 교육한 내용을 보면 공자가 국정을 맡을 지도자를 양성하는 데 목표를 두었음을 알 수 있는데, 가장 기본적인 텍스트인 《논어》에도 정치에 관한 문답이 많이 기록되어있다. 정치 개혁을 진심으로 원하던 공자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새는 보금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나무를 선택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무가 새를 선택할 수는 없다. 나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으며 사람을 탓하지 않는다. 내가 이룩하려는 모든 것은 지식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보다 높은 이상에 이르는 일이다.”

    

공자가 살았던 춘추시대 말기는 신, 구 제도가 격렬하게 부딪치는 시대였으며 정치개혁의 물결이 거세게 일어나 인재가 많이 필요한 시대였다. 공자는 비록 배움에는 구별이 없다는 ‘유교무류(有敎無類)’를 주장하였지만 그 교육대상은 주로 ‘사인(士人:선비)’ 이었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이루기 위한 ‘사인’을 양성하여 신흥정치세력의 발흥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던 것이다.

    

공자의 교과과정

    

이를 실천하기 위해 그 전까지는 귀족 자제에게만 가학(家學)으로 전수되던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의 육예(六藝)를  중국 최초의 민간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신분고하에 상관없이 배울 수 있도록 했다. 당시의 예는 단순한 예의범절이 아니라 각종 공식행사의 의례 절차를 배우는 것이었다. 이를 완전히 익히면 당장 외교나 제사 등 국가적 행사를 주관할 능력이 생긴다. 중국과 우리나라의 육부, 육조 중 예부와 禮部와 예조 禮曹가 외교를 관장하고 있었던 이유는 여기에서 유래한다. 악은 음악인데, 이것도 그냥 음악이 아니라 국가적 행사 때 연주할 음악을 배우는 것이어서 역시 관료로서의 실질적 교육에 해당된다. 사와 어는 활쏘기와 수레타기로, 즉 당시의 중요한 전쟁기술이었다. 공자 스스로도 이 두 기술에 능했다. 서와 수는 문서 작성과 회계처리에 해당되므로 당연히 중요한 실무 능력이었다. 즉 공자는 당장 관료로서 일할 수 있는 실용교육도 중요시했던 인물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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